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비시 프랑스 (문단 편집) == 소멸 이후 == > 당신이 실제로 적의 선전에 봉사하지 않고 또한 당신의 글이나 연설, 행동이나 제스처를 통하여 적극적인 부역행위를 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수치스런 패배 뒤에 물리적이고 도덕적으로 고약한 점령기간 중에, 협력을 가장하여 우리나라를 타락시키고 우리 국민들을 굶기고 우리의 생각과 문화, 자유를 질식시키고, 우리의 동족을 고문하고 인질을 총살하고 우리의 천재들과 문명의 지독한 적에 대항하여, 사적으로 또는 공적으로, 당신은 우리 국민들이 준 신뢰에 기초한 프랑스의 지성으로서 당신의 의무를 제대로 이행하거나, 진실로 가슴속 깊이 우리가 지켜야 할 애국적 위엄에 부합하는 언동을 하였다고 느끼는가? >---- > 1944년 해방 직후 프랑스의 '작가 및 극작가 협회'가 그 회원들에게 답변을 요구한 다음과 같은 질문서의 일부 전범 재판에서 페탱은 조국에 남아 어떻게든 국가와 민족을 보전하고 국민을 전쟁의 참화에 휩쓸리지 않게 하기 위한 최선의 조치였다고 항변했다. 페탱은 국가 반역죄(제75조)와 '의회제도를 멸시하고 히틀러에 협조한 간첩죄(제87조)'로 기소되었으나, [[육군]] [[원수]] 정복을 입고 재판정에 서는 등 당당한 모습을 보였다. 그가 재판정에 입장하기 전까지 방청객들은 "반역자 페탱을 죽여라"라는 구호를 외치고 있었으나, 재판장에 입장한 페탱이 그가 청중을 향해 [[경례]]를 하자 청중들이 모두 일어서서 답례를 했다는 일화가 있다. 그 소식을 들은 드골은 "그는 정말 좋은 사람이었는데...어쩌다가..."라고 촌평. 영관급 시절 드골의 직속상관이 페탱이었고 페탱은 드골을 매우 아꼈으나, 결국 두사람은 정 반대의 길을 걷게 된다. 판결은 끝내 [[사형]]으로 났다. 일설에는 14대 13이라는 간발의 차로 났다고 한다. 사형을 선고받은 페탱은 너무도 충격을 받고 기절했다. 1차 대전에서 구국의 영웅이고 고령인 점 등을 감안해 [[종신형]]으로 감형되어 페이드라루아르 지방 방데 주 서쪽에 위치한 절해고도인 일드외 섬으로 유형에 처해졌다. 그곳에서 페탱은 [[1951년]]에 95세의 고령으로 생을 마감했다. 비시 프랑스가 무너지고 임시정부를 거쳐서 성립된 [[프랑스 제4공화국|제4공화국]]은 기다렸다는 듯이 비시 정권에 대한 [[숙청]]을 시작했다. 우선 페탱을 비롯해 독일에 부역한 중죄가 있는 인사들이 가차없이 처단당했다. 비시 정부의 총리이자 2인자였던 [[피에르 라발]], 내무장관이자 반공 민병대장 조제프 다르낭, 점령지 정무관 페르낭 드브리농이 [[총살]]당했다. 이때 피에르 라발은 조국의 총탄에 죽을 수 없다며 사형을 거부하고 자살을 시도했으나 끝내 실패하고 중태에 빠진 상태에서 총살장으로 끌려갔다. 프랑스의 권위있는 [[연감]]인 퀴드(Quid) 2003년판의 조사에 따르면 사형이 선고된 나치 협력자 6,763명, 실제로 사형이 집행된 나치 협력자가 782명, 징역형(강제노동형, 징역형, 금고형을 포함)을 선고받은 나치 협력자는 89,779명에 실제 징역형이 부과된 자는 38,000여 명에 이른다. 전후의 열악한 경제, 군사적 상황과 몇달마다 내각이 갈려나가는 정치적 혼란, 식민지 전쟁으로 힘들었던 제4공화국에게 비시 프랑스의 멍에는 그 어떤 명분보다 강력한 당위성이었다. 전쟁 초반 프랑스 식민지 대부분은 비시 프랑스를 지지했고 [[자유 프랑스]]는 별로 지지를 받지 못했다. 비시 프랑스 정부가 프랑스 본토를 통제하고 있었고, 프랑스 군대 대다수가 비시 프랑스 정부에 충성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식민지 관료 중에는 [[파시즘]] 사상에 호의적인 인물도 적지 않았고, [[다당제]] 폐지·[[노동 3권]] 부정·[[엄벌주의]] 등 비시 프랑스 정부의 강력하고 억압적인 사회 통제 정책에 호의적인 사람도 많았다. 여기에 더해서 지역에 따라서 일부 가톨릭 성직자들이 현지 식민지 관료에게 '비시 프랑스를 지지해야 한다'고 압력을 넣는 경우도 있었다.[* 대표적으로 프랑스령 아프리카 중 [[서아프리카]]'에 있는 [[가봉]]의 경우가 그랬다. 가봉 총독 마송은 처음에 자유 프랑스를 지지하고자 했으나, 가봉에 있는 프랑스인 가톨릭 성직자들이 총독에게 비시 프랑스에 충성하라고 압력을 넣었다. 비시 프랑스 정부는 이전 정부의 정교분리 원칙을 내팽개치고 노골적으로 가톨릭과 유착하는 방침을 택했다. 보수적인 데다가 프랑스 정부의 정교분리 원칙에 부정적이었던 당시 프랑스 [[가톨릭 교회]]는 비시 프랑스 정부에 특히 호의적이었다.] 1940년 8월 [[차드]] 총독 [[펠릭스 에부에]]가 자유 프랑스 지지를 선언한 것을 시작으로, 1942년까지 서아프리카를 중심으로 아프리카 일부 식민지가 자유 프랑스 측으로 넘어왔을 뿐이다. 이런 상황은 1942년 연합군이 [[알제리]]를 탈환하고 [[알제]]가 자유 프랑스 수도가 되면서 바뀌기 시작한다. 전쟁 중 자유 프랑스가 많은 지지를 받지 못한 점을 들어 '나치의 압제에 용감히 저항한 프랑스 인민들과 레지스탕스' 이미지를 선전하는 프랑스를 까는 사람들도 있다. 당장 자유 프랑스와 레지스탕스가 수를 불리고 활발하게 군사 작전을 하기 시작한것도 독일이 패퇴해가고 ''''프랑스가 확실히 해방될 조짐''''이 보이고 나서부터였지, 그 전까지 레지스탕스는 좌파 성향 [[공산주의]]자[* 원래부터 무장 투쟁에 호의적이며 독소 불가침조약으로 불법화된 자들. 레지스탕스의 50% 차지.]와 [[사회주의]]자[* 전쟁 전에 공산당과 결별한 적은 있었지만 근본적으로 정치적 이상은 공산주의자와 비슷했다.] 또한 친(親) [[파시즘]] 성향 비시 프랑스 정부에 의해 불법화되고 탄압받았기 때문에 같은 좌파 성향인 [[프랑스 공산당|공산당]][* 레지스탕스의 30% 차지했다.]과 협력할 수 밖에 없었다.[* 전쟁 전 사회주의자와 공산주의자들이 선거에서 상당한 지지를 받았다.] 사실 비시 프랑스 외에도 나치 치하의 프랑스인들은 레지스탕스에 적극적으로 가담하기보다는 역사에 기록된 것과 같이 점령군인 독일인들과 사이좋게 지내려 노력하는 자들이 훨씬 많았다. 독일 군인들과 어울려 한자리에서 파티를 하는 프랑스인들의 사진이 공공연히 발견되는 판. 그것이 전후에는 자존심 강한 프랑스의 상당한 굴욕이자 [[불편한 진실]]이 되었기에 비시 프랑스 관련 인물들을 일종의 희생양 삼아 가혹할 정도로 처벌했다는 주장이다.[* 독일 군인에게 [[강간]]당한 [[매춘부]] 등 애먼 '''피해자'''들을 머리를 강제로 깎고 폭행하는 등 정당한 전후처리가 아닌 단순 화풀이에 가까운 모습이 많이 보였다.[[https://fr.wikipedia.org/wiki/Femmes_tondues|#]] 도리어 비시 정부에서 요직을 차지하고 공화국을 배신했던 자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공화국 수립 이후에도 주로 우익 진영, 심지어 [[자유 프랑스]]의 지도자였던 [[샤를 드골]]에까지 붙어 살아남았으며, 이는 [[68운동]] 때까지 계속되었다.] 이는 전쟁 중 똑같이 전쟁범죄를 저질렀음에도 [[슈츠슈타펠]]만 희생양 삼아 군적 말소를 비롯해 큰 처벌을 내리고 [[독일 국방군]]은 '나치에 이용당한 정직한 군인들' 정도로 정상참작하다시피 했던 독일에 대한 비난과 비슷하다. [[프랑수아 미테랑]] 전 대통령이 비시 정부의 하급 관료였고 심지어 페탱에게 훈장까지 받았다는 것이 그가 죽기 직전인 [[1994년]] 밝혀졌으나, 그 자신은 [[1943년]]부터 [[레지스탕스]]에 가담하였고 페탱의 무덤에 꽃을 두는 관례를 폐지하는 등 다른 면모를 보였다. 언론플레이에 노련한 미테랑은 "청년 시절 실수할 수도 있고, 중요한 것은 그 이후의 전력이며, 젊은 시절의 작은 일탈이 대통령 직무 수행에 차질을 빚을 만큼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의연한 태도를 취하여 불길을 끌었다. 그의 지지자들도 이 점을 강조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